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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05.21(수)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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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라인’에 도전하다


운동을 새로 시작하는 데는 저마다 두어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거나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최근 사오십대 사이에 불고 있는 마라톤 바람은 건강을 챙기려는 것보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자기 치유의 몸짓인 것 같다. 삶과 장래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해 그래 뭔가 변화가 필요해,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하며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것 같다. 마라톤 풀코스와 울트라 코스에 도전하고 무릎이 고장나고 숨이 멎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달리는 것은 몸보다는 정신 단련이 목적일 수밖에 ….

곰국을 끓일 때 푹 곤 사골의 숭숭 뚫린 구멍을 보며 이것이 골다공증이 얼마큼 진행된 내 무릎뼈겠거니 살피는 처지에 외줄바퀴 ‘인라인 스케이트’에 도전한 것도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서였다.

새 정부 탄생으로 새해 초에는 여러가지 희망을 품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 두루 실망스럽고, 그렇다고 당신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당신도 마찬가지야 말하기도 간단찮고, 미국을 향해 삿대질을 해봤지만 맥만 빠지고 무력감만 겹쳤다.

마침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거지 싶어 영화를 보았다. 지구를 망치려는 우주적인 거대한 음모가 있지 않고서야 지금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출발한 감독의 상상은 기발했지만 지구를 온전히 지켜낼 가망은 없어 보였다. 희망이 안 보이고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하거나 미치거나 둘 중 하나다. 아니면 반발로 솟구쳐 오르기.

내가 왜 왜 하다가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만수무강하자고 작심했다. 몇 해째 아프다고 아우성인 이빨부터 고치기로 했다. 입안을 샅샅이 두드리고 사진을 찍고 난 의사는 결론을 내렸다. 틀니를 하셔야겠다고. 뭣이라 … 틀니를 끼고 지구를 지키라고 치통은 원래 밤손님이다. 한밤 치통에 시달릴 때는 아침만 되어봐라, 치과에 가서 이를 몽땅 뽑고 틀니를 할 거다, 평생 두 번 다시 치통에 시달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아침이 되어 통증이 사라지면 차일피일 미루는 게 치통이다.

입천장을 가로지르는 쇠판을 집어넣어 왼쪽 어금니와 오른쪽 어금니를 연결해야 한단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대접물에 담가두던 틀니 기억이 떠올라 절망스러웠다. 불쑥 나온 말이 그럼 키스도 못하겠네였다. 친구 딸이기도 한 의사는 움찔하더니 키스를 못할 것도 없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나이에 키스는 무슨 키스 하는 것 같아 내가 실언한 건지 친구 딸이 실언을 한 건지 어색해졌다.

의욕적으로 치과에 갔다가 틀니 선언을 받고 녹초가 되었다. 틀니를 할 시각은 다가오는데, 시름시름 미루다가 최초로 한 일이 인라인 강습에 등록한 것이다. 그래 틀니를 하고 스케이트를 타는 거야. 주위에선 그것도 배웁니까, 걸음마도 강습을 받나요 하고 긁어댔다. 남들은 트랙을 도는 동안 풀밭에서 ‘오른발 왼발 하나 둘’ 하며 연습하기 며칠 만에 트랙에 올라 천천히 두 바퀴를 돌았다.

5월의 밤, 한강 둔치에서 석양을 만끽하고 드디어 해가 꼴깍 지고 달은 휘영청한데 산들바람은 향기롭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젊디젊은 친구들 틈에 끼어 발에 바퀴를 달고 달리는 기분 …. 자연스레 마음병이 나아가는 것 같다. 몸에 생긴 불치병도 마음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고, 마음의 깊은 병도 몸을 다스리면 나아지는 것은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완치는 어렵겠지만 상처는 아물고 다시 새살이 돋고 그 지점에서 희망과 힘을 키우는 것, 그게 세상살이인 것 같다.

이 글은 실은 인라인 도전기가 아니다. 치과에는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알리고 싶어서 쓴 글이다.

김선주 sunj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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